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랑고바르드 왕국 (문단 편집) === [[공위시대]]와 [[아우타리]] === 헬메치스는 알보인을 죽인 뒤 왕을 칭했다. 그러나 공작들은 헬메치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파비아 공작 '''[[클레프(랑고바르드)|클레프]]'''를 왕으로 옹립했다. 클레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헬메치스가 있는 베로나로 토벌대를 보냈고,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와 함께 동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로 도피했다. 클레프는 이탈리아의 미점령지를 마저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라벤나와 투시아를 압박하면서 라틴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랑고바르드 귀족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정복 전쟁 및 숙청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574년, 그는 아내 마사네와 함께 부하 또는 노예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공작들은 왕을 세우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575년 프랑크 왕 [[군트람]]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트렌트를 공략하고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는 등 외세의 압박이 거세지자, 공작들은 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584년 클레프의 아들 '''[[아우타리]]'''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아우타리는 라틴 선주민과 랑고바르드족의 통합을 꾀했다. [[서로마 제국]] 황제들이 줄곧 써 왔던 '플라비우스'라는 칭호를 채용해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개인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칼케돈파]]와 가급적 잘 지내고자 노력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성인들의 유물을 교황 [[펠라지오 2세]]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칼케돈파를 신봉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랑고바르드족의 의식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칼케돈파에 온정적인 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그는 로마(즉 [[카톨릭]]) 의식에 따른 세례를 금지하는 정책을 반포해야 했다. 한편,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체 영지의 1/3을 랑고바르드 귀족이 점유하고 나머지 2/3은 로마인이 소유하는 정책을 반포했다. 이와 함께 라틴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랑고바르드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 제도가 반포되면서 라틴계 지주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공고해졌다. 아우타리는 통치 기간 내내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신설한 [[라벤나 총독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트렌트를 탈환한 뒤 에윈을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다. 585년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하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589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라벤나 총독)|로마누스]]는 프랑크 왕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고, 킬데베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질병)|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계 소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이후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킬데베르 2세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기로 마음먹은 아우타리는 589년 5월 15일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하고 테오도리다의 남자 형제인 군도랄드를 아스트리 공작으로 선임했다. 또한 테오도리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트렌트 공작 에윈과 결혼했다. 이때 아우타리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안술루스가 결혼 축하 행사 중에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